희귀병도 막을 수 없었던 ‘메시’의 질주

글쓴이 에듀진

등록일 2018-04-25 16:45

조회수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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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시가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게 골 세리머니를 하는 모습 [사진 출처=reuters.com]

 

본 기사는 청소년 진로 학습 인문 시사 매거진 <나침반36.5도> 3월호에 수록됐습니다.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Lionel Messi)는 하늘이 내린 인재였다. 공을 다루는 것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재주와 능력이 있었고, 그에 맞게 집안 환경 역시 유소년 축구클럽 감독이었던 아버지, 축구선수인 두 명의 친형과 사촌형들과 어울리며 축구를 즐기며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찬란하게 빛나던 소년은 고작 10살이라는 나이에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의사의 선고를 받는다. 바로 운동선수에게 치명적인 ‘성장호르몬 결핍증’, GHD(Growth Hormone Deficiency)라는 진단이었다. 2천만 명 중 1명이 걸린다는 희귀병을 얻은 메시. 그는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축구 DNA’ 품은 채 태어난, 리오넬 메시
아르헨티나의 사랑을 받는 축구의 신 디에고 마라도나가 선수생활에서 은퇴하던 1987년, 로사리오의 한 노동자 집안에서 갓난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강공장에서 노동자 반장급으로 일하는 호르헤 메시와, 자석공장에서 파트타임 청소부로 일하는 셀리아 마리아 쿠치티니 부부 사이에 셋째 아들인 리오넬 안드레스 메시가 태어난 것이다.

갓 태어난 메시의 몸에는 이미 뛰어난 ‘축구의 DNA’가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탈리아계와 스페인계의 자손이었고, 어머니는 순수 이탈리아계 후손이다. 스페인이건 이탈리아건 축구를 지독히 좋아하는 나라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아버지의 집안은 모두 축구를 좋아하고 직접 축구를 했다. 때문에 셋째 아들 리오넬 메시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축구에 흠뻑 빠져 살 수 있었다. 형인 로드리고와 마티아스, 그리고 사촌인 막시밀리아노와 에마누엘 비안쿠치도 나중에 모두 프로축구선수가 됐다.

‘어린 사자’ 레오를 키운 ‘사커 외할머니’
메시는 리오넬이라는 이름의 애칭인 ‘레오’로 불렸다. ‘어린 사자’가 그의 애칭이자 별명이었다. 4살 때 메시는 아버지가 코치를 맡고 있던 지역 유소년 축구클럽 그란돌리에 들어갔다. 이는 메시의 재능을 맨 먼저 알아챈 외할머니 셀리아(Celia Oliveira Cuccittini) 덕이 컸다.

외할머니는 레오가 어렸을 때부터 축구 연습을 하거나 경기가 있을 때마다 데리고 다니는 등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도와줬다. 아르헨티나에는 일찍이 ‘사커 맘’이 아닌 ‘사커 외할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레오가 11살 생일을 맞이한 직후 돌아가셨다. 어릴 때 레오에게 축구의 측면에서 큰 영향을 미친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레오는 너무나 슬펐다. 레오는 이후 외할머니를 생각하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됐는데, 때문에 축구경기에서 골을 넣을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며 양쪽 검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거나, 두 팔을 벌려 기도하는 듯한 모습의 세리머니를 자주 볼 수 있었다. 그가 넣은 모든 골은 그렇게 외할머니께 바쳐졌다.

점점 두각을 드러내는 어린 메시의 재능
레오는 6살 때 로사리오를 연고로 둔 축구클럽 뉴웰스 올드보이의 스카우트의 눈에 들어 유소년 팀에 입단했다. 작은 소년은 말수도 적고 부끄러움을 잘 탔다. 하지만 그라운드에 들어가 공을 잡으면 어린 사자처럼 푸른 잔디밭을 누볐다. 진정한 초원의 황태자였다.

사람들은 어린 소년의 사인을 받으러 줄을 서기 시작했다. 레오 메시는 6년 동안 뉴웰스의 유소년 선수로 뛰면서 거의 500골을 넣었다. 이때 뉴웰스에서 같이 뛰던 축구 동료들은 대부분 87년생이었기에 ‘87 머신군단’으로 불렸다. ‘87 머신군단’은 유소년리그에선 ‘거의 진 적 없는 팀’이자, 경기가 있을 때마다 하프타임에 놀라운 축구묘기로 관중들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레오 메시는 작았지만 날렵한 움직임과 천재와도 같은 볼 컨트롤로 자기보다 큰 선수들을 놀리듯이 휘젓고 다녔다. 그의 묘기 앞에서 상대편 덩치 큰 수비수들은 추풍낙엽처럼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10세, ‘성장호르몬 결핍’이란 희귀병을 얻다
레오 메시는 10세에 성장호르몬 결핍증이라는 진단을 받으면서 위기를 맞는다. 병의 진단을 받기 전, 가족들은 메시의 키가 작아도 키 큰 상대방 선수 4, 5명 정도는 가볍게 제치고 골을 넣으니 별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다. 또 조금은 낙관적인 마음에 스페인어로 ‘La Pulga(라 풀가)’, ‘빈대’라는 장난스러운 별명까지 지어주기도 했다.

지금은 작지만 언젠가는 큰 키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담은 것이다. 그런데 의사는 당시 127cm로 또래보다 작았던 메시의 키가 멈춰 더 이상 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게다가 지금 당장 거액을 들여서 장시간 치료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 충격을 주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키는 보통 밤중에 뇌에서 분비되는 성장 호르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데,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 레오는 인위적으로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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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지속적으로 아픈 주사를 맞는 것도 힘들었지만, 더욱 힘겨웠던 것은 만만치 않았던 치료비용이었다. 매달 적어도 1천 달러 이상의 거액이 치료비로 쓰였다. 하지만 노동자였던 아버지의 의료보험으로는 2년 정도나 간신히 버틸 수 있을 뿐이었다.

레오의 소속팀 뉴웰스는 처음엔 나머지 치료비용을 계속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나중에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리저리 뛰며 노력했다. 좀 더 큰 구단인 리베르 플라테로 팀을 옮기면 주사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긍정적인 답을 내놓았던 리베르도 곧 메시의 치료비를 지불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버렸다. 아르헨티나에 경제위기가 다시 닥쳤기 때문이다.

한 줄기 구원의 빛, ‘냅킨 계약서’
그러나 절망에 빠져있던 메시에게도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2000년 9월, 스페인 카탈루냐에 살고 있던 친척들이 메시를 카탈루냐의 명문구단이자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은 바르셀로나로 입단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팀의 수석 스포츠 담당이사 카를레스 레하치는 소년을 한번 테스트해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즉시 계약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이사회 멤버들은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이때까지 유럽의 명문클럽이 이처럼 어린 외국선수와 계약을 맺은 선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메시 가족은 그 해 12월 14일까지 믿을 수 있는 확답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날 교섭에 나섰던 바르셀로나 레하치 이사는 마지막에 계약조항을 종이냅킨에 적어 제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촉박했는지 제대로 된 문서로 만들 종이 하나 없었던 것이다. 냅킨 계약서에는 레오 메시가 스페인에서 치료를 받도록 전적으로 지원한다는 조항도 들어 있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어려움들
두 달 뒤인 2001년 2월 메시의 가족은 바르셀로나로 날아가 바르셀로나 클럽의 홈구장인 캄 누 인근의 아파트에 들어갔다. 스페인으로 간 첫 해 메시는 원 소속팀 뉴웰스와 법적인 문제가 매듭지어지지 않아 그리 많은 게임을 뛰지 못했다. 그는 외국인이기에 친선경기와 카탈루냐 리그에서만 뛸 수 있었다.

축구 본연의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일로도 메시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메시는 본래부터 말수가 적었다. 그래서 팀 동료들과도 별로 대화를 하지 않고 지내곤 했다. 이 때문에 동료들은 처음에 그가 혹시 벙어리가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집안문제도 메시를 어렵게 했다. 처음에는 가족 모두가 바르셀로나와 왔지만, 나중에는 아버지만 메시와 남고, 어머니와 두 형, 그리고 여동생 마리아 솔은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 메시는 향수병에 걸렸다. 아르헨티나에서 쓰는 스페인어와 바르셀로나에서 쓰는 스페인어는 달랐다. 아버지 호르헤도 그 때문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곤 했다.

   
▲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맞대결 가운데 하나인 엘 클라시코에서, 바르셀로나 골게터로서 상대편인 레알 마드리드의 세 수비수를 맹렬한 기세로 뚫고 돌진하는 리오넬 메시(맨 오른쪽) [사진 출처=ap.com]

해를 거듭할수록 폭풍 성장하는 메시
레오 메시는 바르셀로나의 축구아카데미 ‘라 마시아’에서 1년을 보낸 뒤 2002년 마침내 스페인 왕립축구연맹에 정식으로 등록됐다. 이제는 모든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세스크 파브레가스, 헤라르드 피케 등 팀 동료들과도 친해져 호흡이 잘 맞아나가고 있었으며, 14살 성장호르몬 치료도 끝마치면서 본격적으로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고의 차세대 ‘소년 드림팀’의 일원으로 성장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2-2003년 처음으로 전 시즌을 뛴 첫해, 메시는 카데테A 소속 선수로 30게임에서 36골을 넣어 득점 1위에 올랐다. 그해 카데테A는 리그와 스페인컵 카탈란컵을 모두 휩쓸어 사상 처음으로 3관왕에 올랐다.

특히 메시는 에스파뇰팀과 벌인 카탈란컵 결승전에서 얼굴에 플라스틱보호대를 한 채 뛰다가 보호대를 벗은 뒤 10분 사이에 2골을 넣어 4대1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이날의 놀라운 활약은 이루 바르셀로나 팬들에게서 ‘파르티도 데 라 마스카라(마스크의 결정타)’라는 전설적인 별칭으로 일컬어지게 된다.

그 해 시즌이 끝나갈 무렵 메시는 잉글랜드의 명문 아스날로부터 이적 제안을 받았다. 아직 스페인 리그 라 리가보다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가 훨씬 더 인기를 끌고 구단의 재정도 탄탄했기에 아스날의 제안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동료인 파브레가스와 헤라르드 피케는 곧 잉글랜드로 떠났다. 하지만 메시는 바르셀로나에 남았다.

바르셀로나 4년차 시즌인 2003-2004년 메시는 바르셀로나 후베닐B 소속으로서 정규시즌을 시작하기 전 치러진 국제 친선경기 4게임에서 잇따라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그리고 정규시즌 1게임을 치룬 뒤 바르셀로나 구단은 메시를 곧바로 후베닐A로 승격시켰다. 후베닐 A에서 메시는 리그 11게임에 출전해 18골을 넣었다. 메시는 곧 국제경기 출전으로 취약해진 1군 팀을 보강하기 위한 멤버로 차출돼 뛰기 시작했다.

거칠 것 없는 축구계의 모차르트
그 시기 메시는 금방 바르셀로나 1군 레이캬르트 감독의 눈을 사로잡았다. 당시 프랑스 출신으로 윙으로 뛴 뒤도빅 지울리는 메시의 플레이를 이렇게 평가했다.

“메시 앞에서 우리는 무너졌다. 우리 편 선수들은 때를 가리지 않고 그를 걷어찼다. 그렇지 않으면 이 친구한테 큰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일어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총알같이 뛰쳐나갔다. 그리곤 드리블로 우리 선수 4명을 제치고 슛을 성공시켜 골을 넣었다. 우리 팀의 중앙 수비수들이 어떻게든 메시만은 막으려 총력을 기울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외계인이었다.”

바르셀로나 후보 선수로 1군 스타팅 멤버와 같이 훈련할 때 1군의 스타이자 당시 진짜 ‘외계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브라질 출신의 신예스타 호나우디뉴도 한번 메시와 뛰어보곤 동료선수들에게 “저 16살 먹은 친구가 머잖아 나보다 더 잘 뛸 거야!”라고 말했다.

호나우디뉴의 이런 평가는 메시의 1군행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2005년 6월 24일 18살 생일날 메시는 바르셀로나 1군 선수로서 계약을 체결했다. 2008년 호나우디뉴가 바르셀로나 팀을 떠나자 그는 호나우디뉴의 등번호 10번을 물려받았다.

세계 최고가 되는 일은 어렵다. 메시는 가족의 사랑에 힘입어 자신의 꿈을 찾았고, 한번 정한 꿈에 대해선 더없이 성실하게 집중함으로써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축구 선수로서 최정상에 오른 메시
그 뒤 펼쳐진 그의 축구선수로서의 성공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쉽게 확인된다.
- 축구선수를 위한 세계 최고의 상인 발롱도르 5차례 수상(이 가운데 4회는 연속 수상)
- 유럽 축구선수를 위한 최고의 상인 유럽골든슈 4차례 수상
- 바르셀로나 선수로서 총 27차례 우승 획득 (스페인리그인 라 리가 8차례 우승, 유럽챔피언스리그 4차례 우승, 스페인 국왕컵인 코파 델 레이 5차례 우승 등 포함)
- 바르셀로나 선수로 372게임 출전해 최다인 370골, 100 어시스트 기록
- 라 리가 한 시즌 최다 기록인 인 50골 득점 기록
- 유럽 축구 클럽선수 한 시즌 최다인 73골 기록
- 스페인의 최고 라이벌전인 바르셀로나FC 대 레알마드리드 ‘엘 클라시코’ 최다인 2골 기록
- 20세 이하 월드컵 아르헨티나 우승 주도
- 2014년 월드컵 아르헨티나 준우승 주도, 이 대회 최우수선수상인 골든볼 수상
- 페이스북 팔로워 8,800만 명

 

리오넬 메시의 성공 과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눈길을 모은다. 

‘왜 축구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축구를 해야 하는지’ 철저한 자기만의 철학이 있었다.
메시는 자신의 꿈을 위해 아르헨티나와 가족을 떠나 바르셀로나에 왔다고 설파한 적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처럼) 파티에 가거나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오로지 축구에 전념한다고 말했다. 이미 메시는 14살이던 때 “혼자 바르셀로나에서 잘 해나갈 수 있겠느냐?” 물은 아버지의 질문에 “전 혼자가 아니에요. 앞으로 아빠도 곁에 계실 거고, 그리고 내 팀이 있잖아요?”라고 대답했다. 

공격수와 플레이 메이커 두 가지를 동시에 잘 하는 ‘하이브리드 천재형’이다.
메시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이자, 가장 많은 어시스트를 한 선수다. 한 가지를 잘 하는 선수는 많다. 하지만 이제까지 이 두 가지를 메시처럼 잘 하는 선수는 없다.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고마움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메시는 자신을 맨 처음 축구로 이끈 외할머니를 아직도 잊지 않고 지금도 외할머니를 위한 골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또 그의 왼쪽 어깨에는 어머니의 얼굴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는 유니세프의 친선대사 일을 하면서 고향 로사리오의 국제대사일도 하고 있다. 자신이 어렸을 때 성장호르몬 결핍증으로 고생한 것을 잊지 않고 청소년들을 지원하는 자선활동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 국적도 가지고 있지만, 고국 아르헨티나를 위해 스페인 청소년 대표 제안을 사양했다.

또한 잉글랜드의 아스날팀이 거액을 준다면서 스카우트 제의를 했을 때도 자신을 도와준 바르셀로나를 떠날 수 없다며 거절하기도 했다.


 

 


출처: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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